흑사병 때문에 미분(Calculus)을 발견한 뉴튼

흔히대 역병’(大疫病) 혹은유행병이라고 불린흑사병’(The Great Plague) 14세기 유럽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재앙이었다. 이 병이 처음 발견된 1347년부터 그 기세가 현저히 줄어들었던 약 4년 동안 이 병으로 죽은 이는 유럽에서만 2 5백만 명에 달했으니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분명한 원인도 모른 채 검게 물든 몸으로 죽어갔다. 물론 이 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352년까지 약 5년 간 계속되던 괴질은 그 위세가 현저히 약화되었지만, 그 후 300여 년간 흑사병은 주기적으로 유럽을 휩쓸었다. 그런데 이 흑사병 때문에 뉴튼은 미적분(Calculus)을 발견하게되었다. 또 다시 1665년에 흑사병이 유럽에 퍼지자 뉴튼이 다니던 케임브리지 대학이 2년동안 휴교에 들어갔다. 이 기간동안 뉴튼은 고향으로 돌아와 그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을 평소에 관심이있었던 자신의 아이디어를 깊게 탐구할 수 있었고 드디어 미적분(Calculus)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 만유인력도 발견하였다. 만약 흑사병이라는 대 재앙이 유럽에 없었다면 뉴튼이 그런 중요한 발견을 하지 못 했을것이다. 

흔히 페스트라고 알려져 있는 이 병이 처음 발병한 것은 서양이 아닌 동양의 중국이었다. 곧 몽고, 인도,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로 확산되었는데, 서양인들이 이 병의 소문을 들은 것은 1346년이었다. 이들은 저 멀리 동양에서 기이하고 비극적인 질병이 창궐한다고 흉흉한 소문을 들었으나 자기들의 문제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행과 통신이 편리해진 오늘날에도 서양인이 볼 때 중국은 먼 곳의 일로 치부되는데, 중세시대 서양인들이 볼 때 중국의 재난을 듣고 위협을 느끼거나 대비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년이 못되어 그 질병은 유럽을 강타했으니 무서운 질병이었다. 흑사병이 서양으로 옮겨간 경로는 다양했을 것이지만 치명적인 것은 선박을 통한 이동이었다.

1346년 몽골군이 크림반도의 카파에 있는 제노바인들의 교역소(交易所)를 공격하고 있었다. 현재는 페오도시야(Feodosia)라고 불리는 카파에 제노바인들은 동양의 오지와 무역할 계획으로 요새화 된 무역소를 건립했던 것이다. 그런데 몽고족은 알 수 없는 질병으로 병력이 크게 감소하게 되자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퇴각하기 전에 치명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채 온기가 가시지 않는 질병으로 죽은 이들의 시체를 성안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그들은 큰 투석기를 이용했다. 작전은 주효했다. 그 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도시에 역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이 질병으로 크림반도에서만 8만 5천명이 죽었다고 한다. 다급해진 제노바인들은 갈리선을 타고 지중해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스트는 그들을 따라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접촉은 1347년 10월에 일어났다.

흑해 지방에서 온 10척의 제노아 상선이 시실리아의 메시나 항구로 입항했다. 불행하게도 그 선박에는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계란 크기의 혹을 가진 선원의 시체가 실려있었다. 시신에서는 피와 고름이 흘러나왔고,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이도 있었다. 이들의 땀, 오줌, 호흡, 배설물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하늘을 찔렀다. 흑사병의 유럽 진출이었다. 물론 이것이 유럽으로 전파된 흑사병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경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그다드를 거쳐 티그리스 강을 따라 아르메니아를 지나 크림반도의 이탈리아 상인들의 화물 수송로를 따라 유럽으로 가는 실크로드가 동양의 향료나 실크가 유럽으로 수출되는 중요 교역로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페스트는 이런 경로를 따라 유럽으로 확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서운 질병은 메시나 항구만이 아니라 제노바와 베네치아로 확산되었고, 1348년 봄까지 흑사병은 시실리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1348년 1월에는 튀니스를 통해 북아프리카로, 마르세유를 통해 프랑스로, 3월경에는 프랑스 중부까지 전파되었다. 로마와 프로렌스까지 침투했을 때는 그해 5월경이었다. 6월에는 파리, 보르도, 리용으로, 7월에는 스위스와 헝가리로 확산되었다. 죽음의 냄새는 1348년에는 잉글랜드로 전파되었고, 그해 6월에는 런던을 공격했다. 곧 ‘검은 연기’는 스코틀랜드로 확산되었다.

흑사병의 창궐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치료법을 알지 못했던 이들의 최선의 대책은 격리와 도피였다. 감염된 환자는 격리시키고, 그들로부터 가능한 멀리 도피하는 것이었다. 부유한 이들은 재산을 버리고 멀리 보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갔다. 가축들은 돌보는 이 없이 떠돌아 다녔다. 때로 부모는 자식을 버렸고, 자식은 병든 부모를 내다버렸다.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남편은 병든 아내를 멀리했으나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이들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옛정이나 돈으로도 죽은 자를 묻을 자가 없었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그 누구도 가까이 접근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병자들과 신체적 접촉만이 아니라 옷에 닿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서로들 얼굴을 맞대고 쳐다보는 것조차도 무서워했다. 하지만 문제는 격리와 도피도 퍼져가는 역병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가 병원균을 옮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를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앴다. 병에 대한 무지는 도리어 병의 전염을 가중시켰다. 죽은 가축들이 실제로 페스트의 확산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죽은 개들과 고양이들은 쥐가 활개 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도리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 사망자가 늘어나자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 설사 죽더라도 천국의 보상을 갈망했다.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교회에 바침으로 보상과 위안을 얻고자 했다. 또 다른 치병의 노력은 고행(苦行)이었다. 이 질병이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라고 여긴 이들은 자기 몸에 채찍질함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이들은 최소한 낮에 두 번, 밤에 한 번씩 벗은 자신의 몸에 채찍을 가했다. 스스로 고통을 느낌으로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이 ‘채찍질 고행단’인데, 흑사병이 유행하는 기간 그 수행자가 가장 많았다. 이들의 수는 약 80만 명에 달했다. 헤르포르트는 이렇게 썼다. 채찍은 일종의 막대기였으며, 커다란 매듭이 있는 세 개의 줄이 달려 있었다. 매듭에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쇠붙이 징이 박혀 있었는데, 그 길이가 밀의 낟알 정도였다. 그들은 이러한 채찍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때렸다. 그 결과 몸이 부어오르고 시퍼래졌으며 피가 땅에 흐르면서 이런 일이 행해지는 교회 벽에까지 튀었다. 그들이 너무 세게 채찍질하는 바람에 징이 살에 막혀서 렌치로 빼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레프(G. Leff)는 <후기 중세의 이단>(Heresy in the Middle Ages)에서 “채찍질 의식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채찍질 의식도 심리적 효과는 있었으나 이 질병으로부터 보호해주지는 못했다.

행운의 부적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스도 상(像), 마리아 상, 성구함 역시 인기 있는 액막이였다. 주술을 행하기도 하고 미신을 따르기도 했다. 가짜 의약품이 활개 치기도 했다. 급기야는 향수나 식초를 몸에 바르기도 했으나 그 어느 것도 역병을 막아내는 묘책일 수 없었다. 당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던 파리대학 의학부 교수들은 질병은 행성(行星)들의 배열 상태의 불균형이 가져온 결과라는 궁색한 설명을 하기도 했다.

이런 공포의 괴질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서 교황 클레멘트 6세(Clement, VI)는 1350년을 성년(聖年)으로 선포했다. 성년이란 가톨릭에서 특별히 기념할 일이 생겼을 때 교황이 선포하는 행사년을 의미하는데, 1300년에 제정된 가톨릭교회의 신앙 상 대사면년(大赦免年)에서 시작되었다. 이 때 교황은 로마를 순례하는 자는 연옥을 통과할 필요 없이 바로 낙원으로 가게 된다고 선언했다. 무모한 교황의 선언 또한 병의 확산에 기여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서 약 100만의 인파가 로마로의 여행에 참여하였으니 괴질은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 흑사병의 시작도 불분명했지만 병의 쇠퇴도 분명치 않았다. 엄청난 피해를 입힌뒤 이 병의 위세가 서서히 감소되더니 유럽의 폐허 위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나 역병이 가져온 후유증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흑사병은 유럽대륙에서 1347년부터 1350년까지 4년 동안 전체 인구 수를 3분의 1 정도 줄였다. 이는 중세 장원제 경제 붕괴를 가져오고 교회 권위를 추락시켜 이후 자본주의 경제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구가 감소하게 되자 자연히 인건비가 상승하였고, 부와 권력을 누리던 지주들은 파산하였고, 중세의 특징이었던 봉건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정치나 경제적인 면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변화가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나 많은 프랑스어 교사들이 목숨을 잃게 되자 영어가 서서히 지배적인 언어로 대치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라틴어는 서서히 소멸되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국어 발전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 예술 분야에도 변화를 보여주었다. 고통 받는 이들과 징벌 받는 이들, 그리스도의 수난, 지옥의 고문 등, 고통과 죽음은 예술작품의 주제가 되었고, 해골과 시체가 주로 등장하는 ‘죽음의 무도’라는 장르가 발전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그려져 있는 오르카냐(Orcagna)의 ‘죽음의 승리’라는 작품이다. 죽음은 가장 큰 힘의 상징이었다.

앞날을 헤아릴 수 없었던 생존자들은 자신도 언제 죽음으로 다가서게 될지를 알지 못하자 도덕적 삶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충격적일 정도로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금욕이나 절약은 무의미했다. 술 취한 매춘부들이 자기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방자하게 행해도 탓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자. 내일 우리는 죽을 테니까.” 기다릴 미래가 없었던 중세인들의 대응이었다.

교회나 교황도 질병을 막아주지 못하자 중세 사람들은, 교회가 자기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다.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광범위했다.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사회와 경제의 유동성도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가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전조였다. 더 큰 변화는 교회 내부였다. 프랑스 역사가 자클린 브로솔레에 의하면 성직 지원자의 격감으로 무식하고 무지한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게 되었고, “이런 무지가 교회를 더욱 타락하게 하여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썼다.

■ 초창기 흑사병이 유럽을 덮쳤을 때 사람들은 이를 종말적인 병으로 생각했고, 절망했고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아무도 이 병에 대해 적절하게 치료하고 대응할 수 없었다. 초창기의 행성의 성좌나 지진, 신의 분노와 같은 원인으로 전염병의 창궐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1350년이 지나면서 곧 이러한 설명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1357-58년 흑사병이 귀환했을 때 인간이 면역력을 가지게 되는 것과 시간적으로 일치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점차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원인(전쟁이나 기근, 높은 인구밀도와 물자부족 등)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점차 흑사병에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시작했고, 논문에 자신들의 ‘경험적인’ 진단법, 치료법과 예방책들을 자신있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첫 발병 이후 급속히 그 위세가 약해져 의사들이 자신들의 의학적 성공에 대해 자부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질병에 대처함으로써, 진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형성되었고, 때로 이것은 자연세계에 대한 승리를 뜻하기도 했다.
주기적인 발병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은 점차 줄어들어 흑사병 이후 첫 백 년 동안 낙관주의를 형성시켰고, 이는 흑사병 이전에 성행했던 ‘죽음의 승리’라는 예술 장르가 쇠락한 것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중세의 문화에서 죽음에 대한 집착(잘 죽는 법, 트랜지무덤 등)은 끈질겼으나 점차 삶에 대한 메시지가 퍼져나갔다.
명예와 영광에 대한 새로운 열망이 나타났고, 이러한 열망은 부르크하르트적인 르네상스를 뒷받침한다.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는 르네상스의 낙관주의가 흑사병의 소멸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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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육 전문가
Math4U 원장 김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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